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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범 교수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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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한의 기준이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 본원사상 연구만 35년) 안 창 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B.C.2세기 초, 후마한 무강왕이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전북 익산의 미륵사를 백제 제29세 무왕(A.D.600-642)이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단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착각하는 이유는 익산의 미륵사는 B.C.2세기 초에 창건되었고, 인도불교는 A.D.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우리나라에 전해되었으며, 우리나라에 도ㆍ불ㆍ유 3교일체의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 학계는 모르고 있다. 여기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미륵사지의 석탑에 대한 해석에 착각이 생긴 것이다.
   둘째 착각하는 이유는 후마한의 54국 가운데 百濟가 있었다. 후마한왕 箕準이 세운 나라가 百濟이다. 삼국시대 溫祚王이 세운 나라도 국호를 百濟라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착각하는 이유는 실증사학자들도 고고학과 더불어 文獻史學을 병행하여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고고학만을 연구하고, 문헌사학을 소홀리 함으로써 年代에 착각이 생겼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졸저 『도ㆍ불ㆍ유의 발상지는 한국의 백두산이다.』
                    『천지인 사상에서 한국본원사상이 나왔다』삼진출찬사, 2010, 9월 중 출간,

1. 문제의 제기

본 문제는 극히 복잡한 문제다. 지금까지의 지식과 학설과 신앙을 초월하여 어느 쪽에 치우침이 없이 냉정히 비판하고 판단해주기 바란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 일명 용화산(全羅北道 益山市 金馬面 箕陽里 彌勒山 一名 龍華山) 남쪽 기슭에 약 2만 3천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넓이의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미륵사지는 사적(史蹟) 150호로서 이를 1980년부터 1986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결과 삼원삼탑(三院三塔) 병치식(竝置式)의 가람배치로써 고대 동양의 가람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특수한 형식의 거대한 가람이었음이 밝혀졌다.1) 현재에도 국보 제11호의 서원석탑(西院石塔)과 보물 제236호의 당간지주(幢竿支柱) 2기(二基)가 남아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전설과 학설이 있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북도 익산군 불우(佛宇)조에는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선화부인(善花夫人)이 익산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 때는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이다. 그 후 유교・불교・도교가 들어오면서 의식구조가 유교・불교・도교 식으로 바꾸게 되고, 내 것을 부정하고 남의 것을 동경하는 사대주의 의식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 내 나라의 고대사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
2) 『삼국유사』권 제2,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 편을 보면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과 선화부인이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하고, 주석(註釋)에서는 익산의 미륵사(彌勒寺)를 왕흥사(王興寺)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를 백제 무왕이 창건한 것 같이 애매모호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3) 『삼국유사』권 제3, 흥법(興法) 제3, 법왕금살(法王禁殺) 편에는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을 미륵사라”하였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4)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는 삼국시대 백제 29세 무왕이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무왕 편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최근(서기2009년)에 발견된 미륵사지의 석탑 내부의 유물이다. 곧 “백제왕후좌평(百濟王后佐平)”이다. 유물에 기록된 <百濟>가 고구려・신라・백제 등 삼국시대 온조왕(溫祚王)이 세운 백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해주기 바란다.
첫째, 삼국시대의 백제(百濟)와 유물에 기록된 “백제왕후좌평(百濟王后佐平)”의 백제(百濟)는 같은 나라인가? 다른 나라인가? 곧 벡제(百濟)에 전백제(前百濟)가 있었고, 후백제(後百濟)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를 모두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창건했는가? 아니면, 다른 왕이 창건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 무왕(武王)과 무강왕(武康王)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다름의 문제를 본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1) 부여의 미륵사(왕흥사)는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창건했다는 것.
2) 익산의 미륵사는 후마한(後馬韓)의 무강왕(武康王)이 창건했다는 것.
3) 『삼국유사』무왕 편의 모순을 밝히는 것이다..
이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2. 백제 무왕이 부여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우선 삼국의 하나인 백제의 29세 무왕이 전북 부여에 있는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문제부터 밝힌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28세 법왕(法王) 편에 “법왕 2년(600)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도승(度僧) 30명을 두었다. 이해 봄에 큰 한재(旱災)가 들므로 왕(王)은 칠악사(漆岳寺)에 행차하여 비오기를 기도하였다. 오월(五月)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법왕(法王)이라 시호하였다.”2) 같은 책, 백제본기 제29세 무왕 편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법왕의 아들인데 “35년(634) 2월에 왕흥사가 이룩되었는데 그 절을 물 가까이에 짓고, 채색은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미었다. 왕은 늘 배를 타고 절로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에는 궁성(宮城)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에 물을 이끌어드리고 4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으며 물 가운데 성(城)을 만드니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닮았다.”3)고 기록하고 있다. 법왕이 왕흥사를 착공하시고 돌아가시자, 무왕이 35년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절을 짓고, 장엄하고 화려하게 완성하니 이 절을 방장선산 곧 미륵사(彌勒寺)라 한 것이다.
『삼국유사』법왕금살(法王禁殺) 편을 보면, “백제 제28세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인데 효순(孝順)이라고 한다. 개황(開皇) 10년 기미(己未 599)에 즉위하였다.……이듬해 경신(庚申)에 30인의 도승(度僧)을 두고 그때 서울인 사비성(泗沘城:지금의 扶餘)에 왕흥사를 짓기 시작하자 승하(昇遐)하였다. 무왕(武王)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닦은 터를 여러 해를 지내서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이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화목(花木)이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와서 그 경치가 장엄하고 고운 것을 구경하였다.(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바로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서 즉위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4)

이상에 근거하면, 백제 제28세 법왕이 착공한 절은 왕흥사(王興寺)였으나, 그 다음 35년 뒤, 백제 제29세 무왕이 그 절을 완성하고, 절의 이름을 왕흥사(王興寺) 곧 미륵사(彌勒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주(後註)에 기록하기를 어머니가 용(龍)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고,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했으며, 즉위한 뒤에 무왕(武王)이라 했다. 미륵사는 왕비와 함께 이룩한 절이라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一然) 스님 역시 전백제(前百濟)와 후백제(後百濟)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도 망각하여 부여의 미륵사와 익산의 미륵사를 혼동하고, 아울러 무왕과 무강왕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로 밝히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3. 익산의 금마와 후마한 무강왕의 익산 미륵사 창건


1) 익산의 금마는 후마한의 옛 수도였다.

그러면 전북 익산의 미륵사는 어떤 배경에 의해서 창건되었는가? 우선 미륵사지가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금마는 과거 어떠한 곳이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무강왕(武康王)은 조선왕 기준(箕準)이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뺏기고 남으로 옮기어 금마산(지금의 익산)에 (후)마한국을 세웠다고 하였다.5) 『삼국유사』마한 편에도 위지(魏志)를 인용하여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과 좌우의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하고,6) 그밖에도 『고려사』지리지(地理志),7) 『후한서(後漢書)』한전(韓傳),8)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制詩註)』 정다산(丁茶山)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 여러 사서에도 금마는 기준이 남천(南遷)한 곳이며, 후마한의 옛 도읍지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믿겠는가?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의 문제다.
황수영(黃壽永) 박사는 고대 사회에 있어서 문화의 중심지 혹은 수도 경영의 조건으로 궁성(宮城)・성곽(城郭)・왕릉(王陵)・사찰(寺刹) 등 4개의 조건을 들고 있다.9) 즉 이들 4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면 수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마가 이들 4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면, 후마한(後馬韓)의 수도(首都)였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금마의 주변을 보면 미륵산 정상에는 기준(무강왕)이 쌓았다는 기준성(미륵산성)이 있고, 중턱에는 사자암이 있으며, 아래에 동방 최대의 석탑이 있는 미륵사지가 있다. 다시 서쪽 2km 지점 연동(蓮洞)에는 보물 제45호의 좌상석불(坐像石佛)이 있다. 여기에서 서북 1km 지점에는 태봉사(胎峰寺) 삼체삼불(三體三佛)이 전한다. 다시 금마에서 서쪽 1km 지점에는 보덕성지(報德城址)가 전한다. 이는 일명 오금산성(五金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청동기유물(靑銅器遺物)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을 끌게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금마에서 서남쪽 4km 지점에 쌍릉(雙陵)이 있다. 이 쌍릉은 『고려사』에 의하면 후조선(후마한)의 무강왕과 그 비의 능이라고도 하고, 일설에서는 백제의 무왕과 선화부인의 능이라고도 한다.10) 금마에서 서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속칭 왕궁평(王宮坪)이 널 리 펼쳐져 있고 동남방 약 3km 지점에 왕궁성(王宮城)이 있으며, 성내 남쪽에는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다. 이 왕궁성에 대한 여러 기록들은 이 성(城)이 마한 시대의 성이라고 전한다.11)
이상과 같이 금마는 도읍지로서의 궁성・성곽・왕릉・사찰 등 4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세인의 전설도 금마의 유적은 마한시대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어떠한 선입견을 두지 않고 생각할 때, 금마는 삼국시대 이전 후마한(後馬韓)의 수도(首都)라 할 수 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도 익산을 마한의 옛 수도(首都)라 하였다.12) 또한 익산을 월지국(月支國)이라 주장하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13) 『삼국유사』어산불영 편에는 월지국을 북천축(北天竺)이라 하였다.14) 북천축이란 남천축 인도에 대응하는 말로서 익산시의 금마를 종교의 요람이라 지칭한 것이다.

 
2) 후마한의 무강왕이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금마(金馬)는 종교의 요람이었고 후마한의 수도(首都)였다면, 미륵사는 당연히 후마한 시대 정부차원에서 지은 가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미륵사는 거대한 사찰로서 민간차원에서는 쉬이 지을 수 없는 가람이었고, 석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극히 시원형의 석탑임을 보아도 미륵사는 후마한 시대의 가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실질적이고,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본서에서 지금부터 근 6000년 전, 태고시대부터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불교(前佛敎)인 천교가 있었음을 밝혔다. 천교(天敎)는 천지인일체의 원리에 의하여 성립된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三敎一體) 사상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24, 진흥왕 37년 조의 최치원난랑비서에도 도ㆍ불ㆍ유 삼교일체의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한 종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천교가 전불교(前佛敎)이며 익산의 미륵사(彌勒寺)인 것이다. 미륵사의 삼원삼탑(三院三塔)은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한 것이며, 도교ㆍ불교ㆍ유교 3교의 교당을 지칭한 것이다. 만주에 가면 한 울타리에 도교법당과 불교법당 그리고 유교법당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익산 금마의 미륵사지는 천교의 상징이며, 후마한의 무강왕 기준과 왕후 선화부인이 창건한 절터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둘째, 『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북도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미륵사(彌勒寺)는 용화산(미륵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馬韓國)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化)夫人)과 더불어 사자사(獅子寺)에 행하고자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연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지을 것을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웠다.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석탑(石塔)이 있는데 극대하여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니 동방의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1)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전설로서 신빙성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설은 그 민족의 신빙성을 나타낸다. 과거의 우리 민족은 글을 써도 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였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마치 명예를 바라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명예를 바라는 것은 진실하게 생각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민족이 그만큼 진실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전설이라 하여도 우리 민족의 경우 거기에 고의적인 속임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수 백 번에 달하는 외침을 받음으로써 사서(史書)가 모두 멸실되었고 한이 맺힌 민족이다. 이를 생각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거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붙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점을 잘 연구하고 음미하면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증언이라 할 수 있고, 훌륭한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긍익은 자신의 저서 『연려실기술』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전제하고, 무강왕은 (후)마한의 기준(奇準)임을 밝히고, 남으로 옮긴 것은 한(漢)나라 혜제(惠帝) 정미(丁未)년이고, 신라 진평왕의 즉위는 진(陳)나라 선제(宣帝) 대건(大建) 기해년이니,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무강왕의 역사를 도왔다 함은 허황하다고 하였다.2) 이는 이긍익 역시 삼국시대 이전 후마한의 무강왕과 선화부인이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삼국지(三國志』를 보면, 마한 54국 가운데 백제(佰濟, 伯濟)가 있었고,1) 『삼국유사』에도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前百濟)의 왕도(王都)”라 하였다.2) 『삼국사기』지리지(4)에 <후한서>을 인용하여 “三韓이 대개 78개국(國)인데 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라고 하였다.3) 이홍직의 『국사대사전』을 보면, 위지(魏志) 한전(韓傳)에 의하여 “馬韓은 50여 小國으로 성립되고, 충청ㆍ전라 양도 지역에 걸쳐 있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있는 집단은 아니지만 그중 백제(伯濟)가 핵심을 이루고 있던 중 4세기 중엽에 백제왕국(百濟王國)이 성립되었다”라고4) 하였다. 백제에 전백제(前百濟)가 있었고, 후백제(後百濟)가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원년 서두에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백제는 후마한의 백제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 삼성기전(상)을 보면 부여시대에도 신라(新羅)라는 이름이 나온다.5) 신라에도 전신라(前新羅)가 있었고 후신라(後新羅)가 있었다는 것이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는 고구려에서 나왔다하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朝鮮)은 고조선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의 한국(韓國)은 삼한(三韓)의 한(韓)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고려ㆍ근세조선ㆍ한국 역시 옛 이름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에서 발견된 金制舍利奉安記의 <百濟王后佐平>의 百濟는 馬韓의 百濟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울러 미륵사는 무강왕(武康王)과 선화부인(善花夫人)이 백제(伯濟)를 일으키면서 창건되었다면, 석탑(石塔)은 백제왕국(百濟王國)으로 성장한 후, 세운 석탑(石塔)이라 할 수 있다.

 
 
4. 삼국유사 무왕 편의 모순


그러면 『삼국유사』무왕 편의 기록은 어떠한가? 내용 그대로 전재한다.
제30대(삼국사기에는 29대, 필자의 주) 무왕(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통하여 장(璋)을 낳고 아이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하였으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薯蕷)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서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공주님은 남 그스기(몰래) 얼어(嫁)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몰래) 안고 가다”라고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 까지 알려지니 백관들이 임금에게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향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향처로 갈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으며 시위하고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몰랐지만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 갔으며 몰래 관계하였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고 동요와 맞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어 생계를 도모하려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요?”
“이것은 황금입니다. 한평생 부자가 될 만 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흙과 같이 쌓여 있오”.
공주가 크게 놀라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천하의 귀한 보배인데 당신이 지금 그것이 있는 곳을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아 구름과 같이 쌓아놓고 용화산(龍華山 혹은 彌勒山) 사자사(獅子寺, 동국여지승람에는 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 오시요”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루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놓았다.
진평왕이 신비로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남으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아뢰기를 “나의 소원은 이곳에 큰 절을 세웠으면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존(彌勒三尊)과 회전(會殿)ㆍ탑(塔)ㆍ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 : 국사에는 미륵사를 왕흥사<王興寺>라 하였다) 하니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그 절이 있다.(三國史에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독녀‘獨女’의 아들이라 전하니 자세치 않다).17)
이상이 문제되는 내용이다.

1) 민족종교를 무시하고, 외래종교를 숭상하는 나쁜 폐단을 낳았다.

 후마한 무강왕이 익산의 미륵사를 창건한 때는 중국 한(漢)나라 혜제(惠帝) 정미(丁未) 년이다. 그때는 B.C 2세기 초로서 인도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이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불교 승려이다. 여기에서 후마한의 무강왕이 미륵사를 창건할 수 있느냐 하고, 그것을 삼국시대의 백제 29세 무왕과 결부시키게 된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800년 내지 900년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마한시대의 미륵사를 삼국시대의 미륵사로, 마한 무강왕의 미륵사를 백제 무왕의 미륵사로, 무강왕의 선화부인을 무왕의 선화부인으로, 무강왕과 선화부인의 무덤인 쌍릉(雙陵)을 무왕과 선화부인의 쌍릉으로 끌어내리게 된다, 곧 후마한왕 기준이 창건한 미륵사를 백제 29세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의 주인공을 무강왕에서 무왕으로 바꾸는 것이다. 마한시대의 불교문화를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마한의 역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일연 스님은 역사에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연 스님은 고의는 아니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순된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가?
마한의 역사를 완전히 역사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고유종교를 무시하고, 불교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사상은 인격도야에 그 이상의 종교가 없다고 하겠으나, 국가적 민족적으로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이 외래종교로 고민하는 것도, 그 기원은 마한의 역사를 없애고, 불교만을 높인 데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2)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다.

① 법왕금살(法王禁殺) 편의 본문에서 처음에 부여의 절터를 닦을 때 왕흥사라 했었으나, 절이 완성되고 난 후 미륵사라 했다. 무왕(武王) 편에는 주(註)를 인용하여 익산의 미륵사를 왕흥사라 하였다.
② 무왕 편의 본문에 무왕과 선화부인이 익산의 미륵사를 함께 지은 절 같이 표현하고 있다. 법왕금살(法王禁殺)에는 주(註)를 인용하여 부여의 미륵사를 왕과 왕비가 함께 지음 절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의 미륵사와 익산의 미륵사를 왕과 왕비가 함께 지었고, 왕흥사라 하는가 하면 미륵사라 한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두 개의 지역에 두개의 절을 함께 지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학자들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실재 현장에 가보면, 익산의 미륵사지는 관대한 넓이에 석탑(石塔)과 당간지주가 있어 미륵사지라 할만하다. 그러나 부여의 미륵사(왕흥사)지는 물가에 있어 좋으나 미륵사라 호칭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현장을 확인함이 없이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3) 백제의 무왕만을 인정하고, 후마한의 무강왕을 무시했다.

삼국시대 백제 제29세 무왕(武王)은 제28세 법왕의 아들인데, 『삼국유사』무왕 편에서 말하는 무왕(武王)은 독녀(獨女)가 연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사람이다.22) 백제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후마한 무강왕의 이름은 기준(箕準)이다. 후마한 백제의 무강왕과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삼국유사』무왕 편의 주(注)를 보면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하여 일연(一然) 스님은 전백제와 무강왕을 무시하고 후백제와 무왕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본원사상을 무시하고 외래사상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4) 백제 무왕의 익산별도 설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익산에 다른 수도를 설치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권11, 전라도 익산 편을 보면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이니 무강왕 때에 성을 쌓고 다른 수도를 설치하여 금마저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3) 또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도 “백제의 무광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정사를 새로이 경영하였다”고 하였다.24) 이에 근거하여 삼국의 하나인 백제의 무왕이 익산에 다른 수도를 설치하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이를 비판하면, 후마한에 백제(百濟)가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백제(百濟)가 있었다. 그리고 후마한 시대의 무강왕(武康王)과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武王)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 백제(百濟)의 무왕이 익산에 별도를 설치하였다 함은 근거없는 주장이며 왜곡인 것이다.
더욱이 무왕이 남천(南遷)하였다거나, 전라북도 익산 금마로 천도하였다거나, 다른 수도를 설치하여 절을 지었다는 기록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무왕의 재위기간 42년을 보면 전라북도 익산에 다른 수도를 설치할만한 정신적 경제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재위기간 중 고구려와 치른 전쟁과 신라와 치른 전쟁이 『삼국사기』에만 보아도 무려 11차의 전쟁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 각산성(角山城)과 적암성(赤嵒城)의 축조(築造), 사비성(泗沘城)과 마천성(馬川城)의 개축이 있었고, 부여에 미륵사(彌勒寺) 일명 왕흥사(王興寺)를 35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또한 그 사이에 기근과 흉년도 있었다.25) 이를 생각하면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익산에 다른 수도를 설치하였다 함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무왕 편과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관세음응험기>에 근거하여 삼국의 하나인 백제의 무왕이 익산 금마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함은 고대사를 자세히 검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역사의 왜곡이라 할 수 있다.


5. 욧점ㆍ결론ㆍ학풍


이상에 서술한 바를 요약 정리하여 결론을 내리면
1) 익산의 금마는 후마한의 옛 수도(首都)였다.
2) 익산의 미륵사는 후마한의 백제 무강왕이 창건한 절이다.
3) 부여의 미륵사는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창건한 절이다.
4) 백제에 전백제(前百濟)와 후백제(後百濟)가 있었다.
5) 마한의 무강왕과 삼국 백제의 무왕은 별개의 인물이다.
6) 선화부인은 무왕의 부인이 아니라 무강왕의 부인이다.
7)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쌍릉은 무왕과 왕후의 릉(陵)이 아니라 무강왕과 선화부인의 릉(陵)이다.
8) 태고시대의 우리나라에 고불교인 천교(天敎)가 있었다.
위의 여덟 가지 사실을 아울러 판단하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는 후(後)마한의 수도(首都)로서 용화산 앞의 폐미륵사는 후마한 백제(百濟)의 무강왕(武康王)과 왕후(王后) 선화부인(善花(化)夫人)26)이 창건한 절로서 천교의 가람이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북 익산 금마의 폐미륵사(廢彌勒寺)는 인도불교 전래되기 이전 우리민족의 본원사찰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울러 전북 익산 금마는 월지국(月支國)으로서 북천축(北天竺)이며 종교의 요람(搖籃)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27)
그러나 문화재관리국과 국사학계는 필자의 『환단고기』인용을 빙자하여 무조건 본 연구를 부정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괴이한 학풍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한다.
1) 우리나라의 학풍은 우리 것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무조건 동경하는 사대주의 학풍이 아닌가?
2) 우리나라의 학풍은 어려운 것은 회피하고 쉬운 것만을 찾는 안이한 학풍이 아닌가?
3) 우리나라의 학풍은 돈만 많이 있으면, 명예를 살 수 있다는 비도덕적 학풍이 아닌가?
4) 우리나라의 학풍은 처세를 잘하고 상을 받으면, 그것을 좋아하는 이기주의 학풍이 아닌가?
5) 진리보다도 다수가 좋아하면, 그것이 정도라는 인정하는 편파적인 학풍이 아닌가?
6) 내가 좋으면 좋아하고, 내가 싫으면 싫어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학풍이 아닌가? 하고 질문한다.
 
   훌륭한 어머니에서 훌륭한 아들이 나오고, 훌륭한 스승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 교육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민족경전 삼륜(三倫)에 사정도경(師正徒敬)이란 말이 있다. 깊이 숙고해주기 바란다.

  [참고사진]
+ 2016년 4월21일 무강왕릉,왕비릉 대왕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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